여포(呂布)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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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여포(呂布)에 대한 단상
  • 입력 : 2019. 09.07(토) 20:08
  • 조도환 논설위원
여포(呂布)에 대한 단상

"위 사진은 아스트라이어를 그린 작품이다."

자는 봉선(奉先), 후한(後漢) 말기 무장(武將)들 가운데 무용(武勇)이 가장 뛰어났던 인물로, 장수로 묘사되어 있다.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武將)으로 지금의 네이멍구자치구[内蒙古自治區] 주위안구[九原區]인 오원군(五原郡) 구원현(九原縣) 출신이며, 자(字)는 봉선(奉先)이다. <삼국지(三國志)>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등에서 후한(後漢) 말기의 군웅(群雄) 가운데 무용(武勇)이 가장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궁술과 승마술이 뛰어나 전한(前漢) 시대에 흉노를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이광(李廣, ?~BC 119)과 함께 '비장(飛將)'으로 불리는 무명(武名)을 떨쳤다. <삼국지(三國志)>에 주(註)로 인용되는 '조만전(曹瞞傳)'에 따르면 민간에서는 그가 탔다고 전해지는 적토마(赤兎馬)와 함께 "사람 가운데는 여포, 말 가운데는 적토마(人中呂布 馬中赤兔)"라는 이야기가 전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절개가 없으며 물욕이 많아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삼국지>에 따르면, 여포는 하내(河内, 지금의 河南省 鄭州)에 주둔했던 병주자사(幷州刺史) 정원(丁原, ?~189)의 가신(家臣)으로 그 무용이 높이 평가되어 주부(主簿)로 중용되었다. 189년 후한의 영제(靈帝, 재위 167~189)가 죽은 뒤 십상시(十常侍)를 제거하려 한 대장군 하진(何進, ?~189)의 부름으로 정원(丁原)과 함께 도읍인 뤄양[洛陽]으로 갔다. 조정의 실권을 놓고 정원과 동탁(董卓, ?~192)이 대립하자, 동탁의 편에 서서 정원을 살해하였다. 그 뒤 동탁의 신임을 받아 그의 양자가 되었으며, 기도위(騎都尉), 중랑장(中郎將) 등의 벼슬을 하였으며 도정후(都亭侯)로 봉해졌다. 하지만 동탁이 뤄양을 파괴하고 장안(長安, 지금의 西安)으로 천도하는 등 절대 권력을 행사하며 폭정을 하자, 사도(司徒) 왕윤(王允)과 모의하여 동탁을 살해했다. 그리고 헌제(獻帝, 재위 189~220)에게 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임명되고 온후(温侯)로 봉해졌지만, 동탁의 출신지인 양주(涼州, 지금의 甘粛省 지역)의 군대를 이끌고 장안(長安)을 공격해온 곽사(郭汜), 이각(李傕)에게 패하여 무관(武關)으로 퇴각하였다.
그 뒤, 여포는 형주(荊州)의 남양(南陽, 지금의 河南省 南陽)에 주둔하고 있었던 원술(袁術, ?~199)의 도움을 받으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하북(河北)에서 흑산적(黒山賊)과 대치하던 원소(袁紹, ?~202)와 합세하였다. 여포의 부대는 장연(張燕, 153~?)이 이끌던 흑산적을 격파하였지만, 약탈을 일삼아 원소의 불만을 샀다. 원소가 죽이려하자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진류태수(陳留太守) 장막(張邈, ?~195)에 의지하였다가, 다시 하내(河内)로 가서 장양(張楊)에 의지하였다. 193년, 조조(曹操, 155~220)가 서주(徐州)의 도겸(陶謙)을 공격하자, 여포는 장막과 함께 조조의 본거지인 연주(兗州, 지금의 山東省 兗州)를 공격해 그 대부분을 점령하고 연주목(兗州牧)이 되었다. 그러나 195년 조조의 군대에 패하여 연주에서 퇴각하여 도겸(陶謙)에게 서주(徐州, 지금의 江蘇省 徐州市 일대)를 물려받은 유비(劉備, 161~223)에 의지하였다. 그러나 유비가 원술과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서 유비의 본거지인 하비(下邳, 지금의 江蘇省 邳州市)를 빼앗고, 스스로 서주자사(徐州刺史)라고 칭했다. 소패(小沛)로 물러난 유비가 구원을 청해오자 여포는 원술의 무장(武將)인 기령(紀霊)과 유비 사이의 화해를 중개하였으나, 그 뒤 다시 유비를 공격해 소패를 빼앗았고, 유비는 결국 조조에 의지하게 되었다.
서주(徐州)에 자리를 잡게 된 여포는 한때 혼담을 주고받으며 원술과 연합을 추진했지만, 혼담을 깨고 조조와 손을 잡았다. 화가 난 원술은 대군을 보내 여포를 공격했지만 크게 패하고 물러났으며, 여포는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조조에게 좌장군(左將軍)의 직위를 받았다. 198년 여포는 다시 원술과 손을 잡고, 소패의 유비를 공격했다. 조조가 유비에게 원군을 보냈지만, 소패는 함락되었다. 그러자 조조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주(徐州)를 공격했다. 여포는 하비성(下邳城)에서 조조의 군대에 포위되었다. 3개월 동안 농성전(籠城戰)을 벌였지만, 결국 부하인 후성(侯成), 송헌(宋憲), 위속(魏續)의 반란으로 조조에게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여포의 방천화극은 그 시대의 장수들에게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유비, 관우, 장비 삼 형제와의 대결에서도 물러섬이 없었던 그 칼끝에 자비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잔인하고, 의리도 없고, 물욕만 쫓고, 여색을 밝히고, 강자에게 빌 붙어사는 그였으니 그를 수하로 둔 자 조차도 두려워했었다고 한다.
하긴, 양부를 둘이나 죽이는 무도함마저 지녔으니, 공정함 없는 방천화극을 휘두르며 적토마 위에 앉아서 눈알을 부라리는 그를 누군들 좋게 봤을 리 없다, “언젠가 때가 오면”, 하면서 이를 갈고 있었을 것이다.
중국의 사상가 루쉰은 말했다.
‘사람을 물었던 개가 물에 빠졌을 때 그 개를 구하려 하지 말아라, 개를 구하는 순간 그 개는 사람을 다시 물기 때문이다. 이때는 몽둥이로 물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패야 한다.’
결국, 조조에게 사로잡힌 여포는 눈물, 콧물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는데 같이 붙잡힌 수하 장수조차 혀를 차면서 죽음을 구걸하지 말라고 꾸짖을 정도였으니, 조조는 사로잡힌 여포를 사람을 무는 개 취급하며 그 목을 몸에서 떼어 놓고 말았다.
표리부동한 자의 죽음답다.

지금의 상황이 묘하게 여포의 방천화극을 떠올리게 한다.
이 핏빛 칼춤이 여포의 방천화극인지, 아스트라이어의 공명정대한 심판의 칼인지는 유권자들이 지켜봐야 한다.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만, 지금의 기회는 하늘이 우리에게 준 절묘한 기회이다. 열강의 틈에서 신흥 강국으로 우뚝 설 시대적 상황을, 이 기회를 활용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다.
냉정하게 지혜를 모으고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
전쟁에서 적을 이롭게 하는 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사형으로 다스려야 한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봐야 한다.
그리고 표로 심판하면 되니 말이다.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인성교육이 필요한 이유이다.
중동의 강소국, 이스라엘의 인성교육도 참고할 만하다.

조도환 신동아방송 논설위원

*한국인성교육연합회*
조도환 논설위원 smspd1@naver.com